1800년 전 개복 수술한 신의(神醫), 화타 이야기
출처=Sun Mingguo/Epoch Times
화타는 중국 후한 말기에 출생한 명의로 양생술(養生術)에 밝았다. 그는 상당한 고령이었지만 외모는 젊은이처럼 보여 사람들은 그를 신처럼 숭배했다. 화타의 의술은 <삼국지· 위서·방기전>과 <삼국지연의>에 기록돼 있다.
화타는 신체 건강에 대한 체육활동의 중요성을 알았다. 이에 오행에 해당하는 다섯 가지 동물(범, 사슴, 곰, 원숭이, 새)의 활동을 본따 오금희(五禽戱)라는 체조를 만들어 보급한 게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침술과 수술의 달인
화타는 약의 전문가로 몇 가지의 약초만으로 효능이 뛰어난 약을 만들었고, 더군다나 약초를 어림짐작으로 조제할 수 있었다고 한다. 침술 또한 뛰어나 그저 한두 개의 침만으로도 병을 낫게 했다. 화타는 환자에게 침을 꽂기 전에 "침에서 느낌이 있으면 알려주시오"라고 말한 뒤, 환자가 그것을 알렸을 때 침을 뽑으면 즉시 나았다고 한다.
현재까지도 침 치료의 주요한 혈 자리로 인정받고 있는 ‘화타의 협척혈’은 척추와 연관된 근골격계 질환을 직접 치료하고, 내부 장기의 작용을 조절하여 오장육부를 다스릴 뿐만 아니라, 척수신경을 직접 자극하여 감각신경과 운동신경을 조절하는 혈 자리다. 화타가 처음 발견했다 하여 현대에 와서 붙여진 이름이다.
1800년 전 화타가 이미 뛰어난 외과 의사였다는 기록들이 있다. 자신이 개발한 마취제, 마비산(痲沸散)을 사용한 외과수술을 했는데, 독화살이 박힌 관우(關羽)의 어깨를 찢고 검게 변한 뼈 부분을 긁어내어 독을 제거하는 데 성공해 귀한 생명을 살렸다.
또, 장부에 생긴 염증이 침이나 약으로 효과가 없을 때 수술을 했는데, 마취 후 개복하여 감염된 부분을 절제하고 복강을 소독한 후 상처에 약을 바르고 꿰맸다고 한다. 환자는 수술 후 4~5일 이내 통증이 사라지고 한 달 이내에 완전히 회복했다고 한다.
10일 이상이나 계속되는 복통에 시달리던 환자가 화타를 찾았다. 환자의 눈썹과 수염이 빠지는 것을 본 화타는 비장의 문제로 보고 수술을 했다. 화타는 비장의 상한 부분과 죽은 세포를 적출하고 연고를 발랐는데, 수술 후 깨어난 환자는 탕약을 먹고 100일이 지나기 전에 완쾌했다고 한다.
조조에게 수술을 권했다가 죽게 된 화타
두풍(만성 두통)에 시달리던 조조도 화타를 불렀다. 화타는 조조의 머릿속에 종양이 있는 것을 보고서 이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마취 후 예리한 도끼로 두개골을 쪼개고 종양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조조는 화타가 자기를 해치려는 것으로 여기고 그를 감옥에 가두고 죽이려 했다. 죽음을 목전에 둔 화타는 자신의 의술을 남기기 위해 <청낭경(靑囊經)>을 집필하고 친하게 지내던 옥리에게 주지만 옥리의 처가 그것을 불태워 버려 청낭경에 대한 내용은 전해진 것이 없다.
조조의 죽음에 대해서는 각각 다른 설이 전해진다.
‘삼국지연의’에는 ‘훗날 조조는 두풍을 치료하지 못하고 이로 인해 죽었다’라고 적었다.
<삼국지 · 위서 · 화타전(華佗傳)>에는 조금 다른 이야기가 있다.
‘208년 무렵, 오랜 만성 두통에 시달리던 후한의 명장 조조는 화타의 명성을 듣고 그를 불러 몇 번 치료를 받았는데, 화타가 조조에게 침을 놓으면 금세 두통이 가라앉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화타는 조조의 계속되는 부름에 아내가 중병에 걸렸다는 핑계로 가지 않았다. 의심스럽게 생각한 조조가 부하를 시켜 염탐한 결과, 화타의 아내는 멀쩡하고 화타도 한가롭게 지낸다는 것을 알고는 분노해 화타를 감옥에 가두었다.
조정의 관리들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화타의 의술이 탁월하니 살려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조조는 "화타 정도의 실력을 갖춘 의사는 얼마든지 더 있다”라며 관리들의 말을 무시했고, 마침내 화타는 옥에서 죽게 된다.
화타가 죽은 후 조조의 두통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은 없었고, 더욱이 자신이 가장 총애하던 아들 조충이 중병으로 앓아눕자 그제야 조조는 “화타를 죽이지 않았더라면 아들도 살 수 있었을 텐데”라며 후회했다고 한다.
성스러운 존재로부터 받은 가르침
화타는 명산을 잘 찾아다녔다. 어느 날 공이에 있는 산에 올라 오래된 동굴 앞에 섰을 때, 질병 치료에 대해 논의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용이 궁금해진 화타는 동굴에 점점 더 가까이 갔는데 누군가 “이런, 화타가 왔어. 그에게 의술을 전수하자”라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아니, 과욕을 부리고, 배려심이 없는 화타 같은 자에게 우리의 의술을 전할 수는 없지”라고 반대했다.
화타가 급히 동굴에 뛰어드니 거기에는 나무껍질로 만든 옷에 밀짚모자를 쓴 두 노인이 있었다.
화타는 노인들에게 다가가 “저는 의술을 배우고 싶었지만 좋은 스승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저를 제자로 삼아 의술을 전수해 주시면 열심히 배워서 반드시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노인은“너에게 의술을 가르쳐도 되지만 언젠가 그 때문에 자신을 잃게 될지 모른다. 허나, 사람들을 지위나 재산으로 차별하지 않고, 욕심이 없이 고행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 기술이 너를 해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화타는 노인의 그 말을 가슴에 새기기로 맹세했다.
노인은 웃으며 돌침대를 가리켜 말했다. “침대 위에 있는 책을 가지고 바로 이 동굴을 떠나거라. 책은 누구에게도 보여서는 안 된다.”
화타가 책을 집어 들고 보니 이미 노인의 모습은 없었다. 황급히 밖으로 뛰어나가자마자 곧이어 동굴이 무너졌다.
동굴에서 가져온 책에는 들은 적도 없는 약의 처방이 적혀 있었고 그 약의 효능은 영험했다. 결국, 화타는 자신의 뛰어난 의술로 많은 사람을 살리기도 했지만, 조조로 인해 죽임을 당했다. 노인의 예언대로 된 것이다.(화타가 쓴 것으로 알려진‘중장경(中蔵経)’중에서)
동양 의학의 시조, 황제의 후계자
당나라 초기의 시인, 왕발(王勃)은 등왕각서(滕王閣序-장강 유역 남창에 있는 정자인 등왕각의 낙성식에 왕발이 참석하여 쓴 서문)로 이름난 사람이다. ‘신당본왕발전(新唐本王勃傳전)’에 따르면 장안에 사는 조연은 좋은 친구 왕발에게서 의술을 배운 것 같다고 한다.
‘황제내경 81장 서문’에서 왕발은 의술이 전수된 순서를 기재하고 있다.
기백, 황제, 무기명 9인, 이윤, 천을, 무기명 6인, 강상(강태공), 문왕, 무기명 9인, 역평, 무기명 6인, 편작, 무기명 9인, 화타, 무기명 6인, 황제, 그리고 조연 순이다.
중국 의학의 기원은 천상의 신, 천제까지 올라간다. 천제가 조연의 스승에게 그것을 전해 조연과 황제에게 전승된다. 다시 황제가 뇌공에게, 이어서 은과 주나라 왕조로 계승되었다.
중국 고대 동약의약은 2400년 전 전국시대 후기에 편작으로 계승되어 1800년 전인 후한 시대 화타로 전해졌다. 편작과 화타는 황제의 동양의학의 진정한 후계자이며, 의신(醫神)으로 존경받고 있다. 두 사람은 신체 속까지도 꿰뚫어 볼 수 있는 진정한 눈과 멋진 수술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출처: http://www.epoch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07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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