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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고수의 지혜란? 읽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 두 편

고수의 지혜란? 읽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 두 편


당신을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설명할 필요가 없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설명해줘도 소용없다. 이는 경지의 문제이자 지혜의 문제다. (인터넷 사진)


첫 번째 이야기


석가모니가 걸었던 염주를 모셔 유명해진 절이 있었다. 염주를 모신 구체적 장소는 선사와 일곱 제자만 알고 있었다.


일곱 제자는 모두 깨달음이 좋아서 선사는 누구에게 의발(衣鉢)을 전수해도 불법을 빛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염주가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선사는 일곱 제자에게 물었다. “너희 누가 염주를 가져갔느냐? 제 자리에 갖다 놓으면 나도 묻지 않겠거니와 불조(佛祖)께서도 탓하지 아니하실 것이다.” 제자들은 고개만 흔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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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주의 고사 (인터넷 사진)


 이레가 지났으나 염주는 나타나지 않았다. 선사가 말했다.

 “누구든 인정하기만 하면 염주를 주겠다.”

 그러나 다시 이레가 지나도록 자신이 가져갔다고 인정하는 이도 없었다.

 선사는 크게 실망했다.

 “내일 너희 산을 내려가라. 염주를 가진 이는 남고 싶거든 남아라.”

 이튿날 제자 여섯이 긴 한숨과 함께 짐을 싸서 미련 없이 내려갔고, 제자 하나만 남았다.

 선사가 남은 제자에게 물었다.

 “염주는?”

 제자가 말했다.

 “저는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그럼 왜 도둑질 한 죄를 쓰려는 게냐?”

 제자가 말했다.

“이 며칠 동안 저희는 서로 의심했습니다. 나서는 사람이 있어야 다른 사람이 해탈을 얻지요.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염주가 사라졌어도 부처께선 여전히 계십니다.”

 선사는 웃더니, 품에서 염주를 꺼내 이 제자의 손에 걸어주었다.

 

필자의 깨달음 : 사정을 분명하게 말하는 게 능사가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감당할 수 있는지, 행동할 수 있는지, 해결할 수 있는지, 바로잡을 수 있는지, 고칠 수 있는지다.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지, 더욱이는 남을 배려할 수 있는지다. 당신을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설명할 필요가 없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설명 해줘도 소용없다. 이는 경지의 문제이자 대지혜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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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 사진)

두 번째 이야기

어느 날 공자의 한 학생이 문밖에서 땅을 쓸고 있었다. 녹색 옷을 입은 객(客)이 오더니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뉘시오?”

학생은 자못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저는 공자님의 제자이올시다!”

객이 말했다.

“마침 잘 됐구려. 내 당신께 가르침을 하나 청해도 될는지요?”

학생은 기뻐하며 “물어보시오!”라고 답한 뒤 속으로 생각했다.

‘대체 무슨 괴이한 문제를 내려는 것인고?’

객이 물었다.

“일 년은 대체 몇 계절이오?”

학생은 이런 문제를 다 물어보나 싶었으나 얼른 대답했다.

“춘하추동 4계절이지요.”

객은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틀렸다오. 1년은 3계절이 있을 뿐이오.”

“허, 참! 당신이 틀렸습니다. 사계절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 고집을 부렸고 급기야 내기까지 하게 됐다. 만약 4계절이라면 객이 학생에게 세 번 절하고, 3계절이라면 학생이 객에게 세 번 절하기로 했다.

공자의 학생은 속으로 자기가 틀림없이 이겼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객을 데리고 스승을 만나러 갔다. 마침 이때 공자가 집안에서 나왔다. 학생이 한발 앞서 다가가면서 공자에게 여쭸다.

“스승님, 1년은 몇 계절입니까?”

공자는 객을 한 번 슬쩍 바라보고는 말했다.

“1년은 3계절이다.”

이 학생은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으나 감히 바로 되묻지는 못했다.

객이 재촉했다.

“절을 하시오. 절을 해!”

별수 없게 된 학생은 순순히 세 번 절했다.

객이 떠난 후 학생은 기다렸다는 듯이 공자에게 물었다.

“스승님, 1년 분명하게 4계절이 있는데 스승님께선 왜 3계절이라고 하셨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자네는 방금 그 사람의 전신이 모두 녹색인 걸 보지 못했나? 그는 메뚜기라네. 메뚜기는 봄에 태어나 가을이면 죽어버리지 않는가.

그는 여태껏 겨울을 본 적도 없다네. 만약 자네가 3계절이라고 하면 그는 수긍하겠지만, 4계절이라고 하면 저녁까지 시끄럽게 말해도 말이 통하지 않았을 것일세. 자네가 손해를 보고 세 번 절을 했지만, 그게 뭐 대수로운 일인가.”

필자의 깨달음: 정말 공자에게 이런 일이 있었는지는 믿거나 말거나지만, 이 고사는 우리 모두가 귀담아들어둘 만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다툴 필요가 없다. 각자 생각이 다르고 사물을 보는 견해도 다르다.

예전에 필자는 사정을 분명하게 말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깨끗하고 정직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제각각 상황이 다르므로 늘 분명하게 말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점차 이해하게 됐다.

앞서 소개한 두 가지 이야기를 곱씹어보면 ‘현명한 사람은 죄를 다투고, 어리석은 사람은 이치를 다툰다’(賢人爭罪 愚人爭理)는 말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여기서 능력 밖의 일을 요구하는 것도 죄를 짓는 것이라는 옛 정신을 엿볼 수 있다-역자 주)

 

현명한 사람이 ‘안으로 찾아’(內求)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의 원인을 찾는 것은 안으로 찾는 중에 심령을 정화할 수 있기 때문이며, 어리석은 사람이 밖에서 일의 진상을 찾는 것은 명예와 이익에 영혼이 더럽혀졌기 때문이다.

 

죄를 다투는 사람은 마음이 갈수록 차분하고 편안해지며 이치를 다투는 사람은 마음이 갈수록 울적하고 초조해진다. 오래되면 이치를 다투는 사람은 우울함이 깊어져 병이 생길 것이지만 죄를 다투는 사람은 몸과 마음이 유쾌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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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ntdtv.kr/people-culture/story/15060.htm